여행 둘째 날 아침은 일찍 시작하기로 했다. 혼자 장기 배낭여행은 처음이었던지라, 여름에 이탈리아 여행을 어떻게 하는 게 현명한지 몰랐던 탓이다.
*7,8월에 이탈리아, 스페인, 크로아티아 등 남유럽을 여행할 때는 느지막히 일어나 오후 4시 이후부터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거나, 10~12시까지 잠깐 산책하고 12~4시까지는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햇빛을 피하는 걸 추천한다. 잘못하면 일사병으로 여행 전체를 망칠 수 있다.
여행객은 거의 없고 상인들이나 주민들만 빗질을 하는 베네치아의 아침, 목표 없이 골목 골목을 돌아다니다 위 사진의 광장을 찾았다. 관광객은 없는, 아주 작은 광장. 그리고 그 광장에 있었던 작은 기념품점. 아저씨는 쬐끄만 동양 여자애가 귀찮다는 눈길이었고 나같은 관광객 한 둘 정도나 기웃거리던 그 가게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습작 복사본을 3유로에 팔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몇 일후면 그가 활동했던 피렌체에 갈 예정이었고, 당연히 피렌체에는 이런 복사본이 널렸을거고, 어쩌면 3유로보다 싸게 살수도 있을테니까, 라는 생각에 만지작거리던 손을 거두었는데 그건 이탈리아 여행을 통틀어 내가 저지른 멍청한 실수 중 하나였다. 피렌체에는 그 복사본이 없었다. 로마에도 없었다 ㅠㅠ
저렴한 가격의 젤라또를 파는 가게에서 산 젤라또 한 스쿱을 핥아먹으며 산마르코 광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여긴 어디? 나는 누구?..................응?..........
바닷물은 넘실 넘실, 좌우를 아무리 봐도 산마르코 광장은 보이지 않았다..................에라 모르겠다 왼쪽으로 고우!
그리고 나는 (뜬금없이) 무라노 섬으로 가는 배를 탔다......................왼쪽으로 터벅터벅 걷다보니 광장은 커녕 선착장이 나왔고, 원래대로라면 산 마르코 광장에 갔다가 오후에 무라노 부라노 섬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혼자 다니는 여행에 그냥 발길 닫는대로 가는 거지 뭐. 매표소에서 12h권을 끊고 수상버스에 탑승했다.
독일 내륙에 있느라 배는 커녕 바다도 제대로 못 봤으니 물 구경이나 실컷해야지. 배는 무라노 섬 가는 사람들로 꽉꽉꾹꾹.
무라노 섬에 도착했다! 시간으로는 40분쯤 소요되었지만 물비린내 섞인 바람과 오후 햇살에 반사되는 베네치아의 건물들을 구경하다보니 시간은 금방 갔다. 사진은 유리공예로 유명한 무라노 섬의 유리 공방 간판.
베네치아 본섬에 비해 훨씬 작고 시골스러운 느낌의 무라노 섬. 유리공예가 유명해서 섬 전체에 유리 공방이 분포되어 있다. 현재에는 많은 기념품들조차 메이드 인 차이나이지만, 잘 살펴보면 정말 무라노 섬에서 만든 예쁜 유리 공예품을 살 수 있다. 한참 정오를 지나 햇빛이 뜨거웠던 무라노 섬.
작고 섬세했던 과일 유리 공예품. 그리고 창에 비친 내 똑딱이 카메라.
무라노 섬을 한바퀴 빙 돌면 또 선착장이 나온다. 여기서 부라노 섬에 가는 수상버스를 탈 수 있다. 무라노 섬에서 부라노 섬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으니 꼭 가보시도록! 부라노 섬은 레이스 공예로 유명하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부라노 섬. 개인적으로는 덜 상업화된 느낌의 부라노 섬이 참 좋았다. 아, 예전에 아이유 뮤비도 여기서 찍었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한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듯 하다.
알록달록한 건물들과 예쁜 레이스의 부라노 섬을 뒤로 하고 다시 수상버스를 탔다. 본섬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직 오후였지만 밥도 못먹고 물도 다 떨어지고 땀때문에 선크림도 다 지워지고 완전 방전 직전....지치고 외로울 때는 혼자 여행하는게 조금 슬프다.
리알토 다리와 더불어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관광지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 너무 지쳐있었던 내게도 산 마르코 광장의 크기는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도 비둘기도 많다는 점. 광장에는 굉장히 오래된 유서깊은 카페가 하나 있는데, 에스프레소 한잔에 무려 5유로가 넘었기 때문에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나중에 지도를 제대로 들여다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숙소에서 산 마르코 광장과 무라노 섬으로 가는 그 선착장은 정 반대 방향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매 방학마다 했던 내일로 여행에서는 항상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구글이나 네이버 맵으로 장소를 찾아갔다. 유럽에 와서는 밖에서는 인터넷을 쓰지 않기도 하고 아예 와이파이에 대한 기대도 없어서 핸드폰은 (살고 있는 독일 외에서는) 음악 듣는 엠피쓰리나 다름없다. 항상 지도와 현지인들에게 물어물어, 그것도 아니면 오로지 감 하나로 찾아가는 여행을 하게 되면 종종 이런 경험을 겪게 된다.
광장 근처의 기념품 샵에서 본 화려한 가면들. 가면 전문점이었는지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더 화려한 가면들을 진열해놓았다. 그리고 비쌌다.
토이카메라로 찍은 베네치아 골목의 한 풍경. 예쁘다.
그리고 지옥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ㅠㅠ
숙소로 돌아가서 먹을 생각에 3유로짜리 큼지막한 피자를 휴지에 둘둘 싸서 들고 리알토다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일단 리알토 다리만 찾으면 숙소는 오로지 한 방향이므로 금방이야, 라는 나의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오븐에서 뜨끈뜨끈하게 구워졌던 피자가 차갑게 식어간 건 내가 리알토 다리를 1시간정도 넘어서 찾고, 그로부터 또 1시간 정도 길을 헤매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때 쯤인가. 어금니를 앙 물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피자는 숙소에 가서 샤워하고 먹을 거라는 고집으로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베네치아는 지도가 사실 별 의미가 없고 벽에 붙어 있는 화살표를 보고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일단 길을 잃으면 별 도리가 없다. 그냥 걷고 걷고 화살표를 찾아서 또 걷고..
3시간을 헤매고 중앙역 너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초탈한 상태였다. 첫날 도착한 길 그대로 중앙역에서 숙소까지터벅터벅 걸어서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전자레인지에 뎁혀 먹은 피자는 눈물나게 맛없었다. 하지만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언니랑 오랫만에 한국어로 수다를 떨며 기운을 회복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날 준비를 한 후 곧장 잠이 들었다.